기자명 배공민 기자 (rhdals234@skkuw.com)

▲ 조주상 감독이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한영준 기자 han0young@skkuw.com
 
화장실에 붙어있던 여성 픽토그램이 세상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복제한다. 복제된 픽토그램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잠시 후 걸음을 멈춘 픽토그램은 남성들로만 이뤄진 엘리베이터, 비상구의 픽토그램에 들어가 똑같은 자세를 취해본다. 불평등한 세상의 모습을 바꿔나가는 픽토그램의 이야기. 조주상 감독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양성평등>의 내용이다. 국내외 영화제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2분 18초의 짧은 애니메이션은 조 감독의 1호 작품이 됐다. 1년에 1편씩 100편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힌 조 감독을 만나봤다.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것.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 있어서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이제 그런 것들을 좀 더 아끼고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 2002. 조주상의 '디자인 솜씨' 중에서

배공민 기자(이하 배): 원래 직업은 디자이너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신 건가요?
조주상 감독(이하 조): 웹디자인을 10년 했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디자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엉뚱한 생각이 계속 났어요.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던 참에 ‘서울여성 디지털 디자인 공모전’이 눈에 팍 들어온 거죠. 마감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었어요. 시간이 짧은 만큼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양성평등>을 만들었어요. 첫 작품이라 아이디어는 뛰어난데 기술적으로 굉장히 떨어져요. 만들면서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에 대한 지식의 부족함을 느껴서 공부도 다시 제대로 했죠. 그렇게 애니메이션 쪽으로 전향하게 된 거예요.

배: 디자인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작업이고, 영화감독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작업인데요. 서로 상충하지는 않나요?
조: 그렇죠. 독립애니메이션은 예술적으로 새로운 창작을 추구해요. 하지만 디자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공부를 해요. 그 영향을 받다 보니 객관화가 전제돼 작업하는 것 같아요. 실험적인 독립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감독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힘을 쏟다 보면 관객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쉬워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재미있게 만드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을 해요. 그게 제일 잘 반영된 작품이 <양성평등>이죠. 양성평등이 어려운 주제인데도 짧은 시간 안에 하고 싶은 얘기와 재미를 모두 담았잖아요. 그래서 예술과 디자인적인 객관성을 같이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배: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픽토그램이라는 소재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조: 픽토그램은 직관적으로 ‘사람’을 나타내 줄 수 있는 소재에요. 그리고 집 밖을 나오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보게 되는 게 픽토그램이에요. 알게 모르게 인간하고 친숙한 매체죠. 그런 픽토그램이 움직이고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신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픽토그램은 정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즐거움도 배가되고요.

배: 소재가 픽토그램이라서 더 편하거나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조: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한테 친숙한 소재라는 거예요.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손가락이나 표정 같은 세부적인 요소를 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점. 그래서 작업이 쉽고 렌더링도 빠르다는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세부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어요. 감정을 표현하는 게 힘들다는 거에요. 손가락이랑 얼굴표정이 있다면 웃을 때 입 꼬리 올려주고 슬플 때 입 꼬리 내려주면 간단해요. 하지만 이건 온몸으로 표현을 해야 하죠. 어쩔 수없이 슬랩스틱에 의존해야 되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도 표현이 잘 안 돼요. 구 형태의 동그란 얼굴을 돌려도 여전히 그냥 동그랗거든요 하하. 그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어깨도 돌리고, 몸도 살짝 돌리고, 그런 식으로 과장해서 표현해요.

배: <양성평등> 이후에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단편을 많이 만드셨어요.
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양성평등>을 만든 이후였어요. 영화제에서 인권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스스로가 사회문제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고 인권에 관한 영화를 3개 만들자는 목표가 생기게 된 거에요. 그렇게 장애인 문제를 다룬 <편견>, 아동문제를 다룬 <아동학대>도 나오게 된 겁니다. <편견>에서는 픽토그램 속에 숨어있던 장애인들의 모습을 드러내서 장애인들은 못 할 것이라는 편견을 꼬집고 싶었어요. <아동학대>에서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학대당하는 아동 픽토그램이 나오는데 다른 성인 픽토그램들이 구해주죠. 뒤집어져있는 아동 픽토그램을 거대한 성인 픽토그램이 똑바로 세워주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배: 작품이 영화제 초청도 많이 받고 수상도 하는 등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조: 가장 큰 이유는 아이디어가 좋았기 때문이겠죠. 또, 디자인을 전공하며 익힌 ‘객관화,’ 즉 관객의 반응을 고려할 줄 안다는 점도 한몫했을 거에요.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이 웃길 바래요. 웃음을 유도한 부분에서 관객들이 웃으면 희열이 느껴져요. 사실 이 얘기는 뒤집어 말하면 웃음기 없이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은 못한다는 얘기도 되겠네요. 하지만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제 색깔은 재밌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조건 해피엔딩이에요.

배: 작품 활동을 위해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셨을 때 두려움은 없었나요?
조: 남들이 선망하는 게임회사에서 개임개발자로 일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어요.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데 시간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회사를 때려치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돈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자고 선언한 게 이제 6년차예요. 지금 경제활동은 시간이 될 때 우연히 들어오는 일거리만 하고 있어요. 생활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학원 강사도 하고,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강의도 해요. 다행히 굶어죽지 않고 살고 있네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거예요.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굶어죽지 않을까? 하지만 직접 해보니 그렇지 않을뿐더러 내가 적어도 인생에서 시도를 한번 해봤다는 게 굉장히 귀한 경험이 돼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행복해요. 하고 싶은 걸 하잖아요.

배: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쉬운 길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조: 아직 열악하죠. 영화계에선 우리나라 영화가 많이 성장하며 기반을 잡아가고 있잖아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아직 그러지 못해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소규모 제작자들은 있는데, 사람들이 잘 안 봐요. 관심이 없는 거죠. 관객이 없다보니 투자도 없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성장이 더딥니다. 이런 악순환 때문에 애니메이션 산업의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하지만 그래서 더 열의가 생기기도 해요.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은 국내의 제작자들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이 길, 내가 일으켜보리라!

배: 앞으로는 애니메이션에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으세요?
조: 감독은 작품으로 말해요. 작품에서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느냐 그게 그 사람의 삶이고 가치관이죠. 제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담고 싶은데 한 가지 소재에만 얽매이고 싶지는 않아요. 종교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사랑, 행복 같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작품에 나타내고 싶어요.

▲ 위<아동학대> / ⓒ 인디스토리

 

▲ 아래<양성평등> / ⓒ 인디스토리